[프레시안] 정창수 기자,  14.10.8

 

[창비주간논평] 2015예산, 철학이 부재한 재정건전성 포기예산

사람들은 흔히 경제활동이라고 하면 주식이나 부동산 등 민간경제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정부의 규모가 작은 우리나라에서도 공공재정의 비중이 민간경제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예를 들면 2013년 명목 GDP는 1428조원인데, 공공재정은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예산과 공기업 및 공공기관까지 하여 절반을 넘는다.

그런데 정부예산은 꾸준히 증가한다. 지하경제가 줄어들고 최근에는 국채발행까지 크게 늘리는 등 각종 정부 재정수입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출도 같이 증가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산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신규예산이다. 매년 사업이 크게 증가하기 때문에 정부의 예산편성과 의회의 심의과정이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2014년 예산에서 신규예산은 전체의 0.6%인 2조원에 불과하다.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박근혜 예산’도 여기 포함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산은 하던 사업을 계속하는 가운데 점증적으로 조금씩 증가하거나 변화하여 간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점증주의 예산편성이라고 하고, 이에 반하여 대폭적이고 체계적으로 예산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총체주의 예산편성이라 한다. 따라서 예산은 총체주의를 지향하지만 현실은 점증적으로 변화한다고 할 수 있다. 총체주의 예산편성에서 이야기하는 제로베이스 예산편성이라는 것은 항상 이상에 불과하다는 푸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제로베이스 예산편성을 했던 사례는 군사정부 시절인 1985년밖에는 없다.

2015년 예산, 점증주의 부채증가 예산 

정부는 총지출 376조원, 총수입 382조 7천억원으로 책정한 2015년도 예산안을 확정했다. 전체적으로는 5.7% 증가로 점증주의 예산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정부는 세입여건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경제활력 제고를 위해 최대한 확장적으로 편성됐다고 주장한다. 재정건전성 악화를 감수하고라도 경기부양에 힘을 쏟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빚내서 경기를 부양하는 방식은 과거 이명박 정부의 전철을 밟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일자리 창출을 명분으로 2009년부터 3년간 22조원이 투입되는 4대강사업을 진행했고, 경기부양책으로 13조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결국 이명박 정부 5년간 98조원의 재정적자와 경제양극화 심화 등의 폐해만을 남기게 되었다. 적자재정까지 감수한 이번 예산안은 국가부채 문제를 악화시켜 재정건전성에 심대한 위협을 주게 될 것으로 보인다. 

2013년 국세수입 목표치는 210조 4000억원이었으나 실제치는 201조 9000억으로 8조 5000억원이 부족했으며, 올해도 8조원이 넘는 세수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또한 2013회계연도 국가결산보고서에 따르면 중앙과 지방 정부의 빚을 합친 국가채무는 482조 6000억원으로 국민 1인당 부담액은 1000만원에 육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내용적으로 보면, 축소되어야 마땅한 토건 및 SOC 투자 부문 예산이 다시 증가했다. 2조원 가까이 줄여야 하지만 오히려 7천억원을 늘렸다. 세월호참사를 계기로 각종 안전시설에 대한 유지·보수를 위해 SOC 예산을 대폭 늘렸다고 정부는 주장한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집행해야 하는 SOC의 유지·보수관리 예산이 안전예산으로 분류되었다는 비판이 높다. 지자체의 소방헬기 구입을 위해 1천억원을 배정한 것이 그 예이다. 결국 이명박 정부마저도 정권후반기에는 감소시켰던 토건예산이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예비타당성 조사대상을 500억원 이상 사업에서 1000억원 이상 사업으로 완화하겠다는 정부의 의도 또한 지난 개발연대 시절처럼 토목과 건설업 부양을 통해 단기적으로 경제성장을 도모하겠다는 발상이다.

여기에 창조경제, R&D 등의 예산도 서민경제보다는 재벌 대기업에게 혜택을 주는 예산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전기자동차 보조금 지원을 확대(800대→3000대)하고, 하이브리드차 보조금을 신규 도입(4만대, 대당 100만원)하겠다는 방안은 사실상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회사에 대한 지원이다. 차라리 그 예산으로 대중교통체계를 정비하는 게 대다수 국민에게 훨씬 효율적이다. 생활밀착형 예산이라는 이름으로 70개 사업을 따로 묶어 제시했지만 기업밀착형 예산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문제의 원인은 철학의 부재 

결론적으로 이번 예산안은 점증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확장이라는 미명하에 재정균형을 포기한 적자예산이다. 전체적인 구모는 점증주의적이지만 실제 내용에서는 부채증가와 지출구조의 역진성이 보인다. 

더 큰 문제는 뚜렷한 방향이 없다는 점이다. 복지도 늘리고 건설도 늘리고 그야말로 모든 것을 하겠다고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예산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재정의 철학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비록 잘못되었지만 이명박 정부는 토건이라고 하는 명백한 방향과 철학(?)이라도 있었다. 이에 반해 현 정부는 현상유지에 급급하여 정부의 정책이 무엇을 위해 가야 하는지를 예산편성에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남은 것은 국회다.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근본적인 경제활성화 대책과 서민경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방안을 담은 국회 예산심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표류하는 재정의 방향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물론 난망한 기대이기는 하다. 그나마 과거와는 달리 예산에 대해 언론과 시민단체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이 실낱같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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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정창수 기자  14.8.11

 

[위기의 4대강, 어디로 가나②] 수자원공사의 8조원 재정 지원 요구에 부쳐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정부가 이명박 정부에서 진행된 4대강 사업의 뒤치다꺼리를 위한 청구서를 제출한 것이다. 최근 수자원공사(아래 수공)가 국회에 제출한 '4대강 투자비 회수대책 필요성'이라는 문건에 따르면, 수도요금 인상이나 친수구역 개발 등을 통해서는 8조 원에 이르는 4대강 투자비를 회수할 수 없기 때문에 정부의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관련기사 : [단독] 수공의 4대강 투자 8조원 혈세로 때운다?).

수공은 22조 원의 총사업비 중 8조 원을 공사채권을 발행해 조달했다. 그 결과 4대강 수행 전인 2008년 말 2조 원이었던 부채가 2013말에는 14조 원으로, 무려 7배나 증가하는 등 재무구조가 악화되었다.

4대강 사업 전보다 7배나 증가한 수공의 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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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강서구 수자원공사 앞에 4대강 국토종주 낙동강 자전거길 개통을 축하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기념비가 놓여져 있다. (자료사진)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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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결산자료를 보면, 2008년 20%였던 수공의 부채 비율은 2013년 121%로 늘어났다. 그나마 도로공사 주식 2500억여 원 등 현물출자를 통해 자산을 증가 시켜 부채비율의 증가를 조금이나 줄인 결과다.

특히 수공이 투자비 회수를 위해 부산도시개발공사와 함께 부산 강서구 일대에 5조4천억 원 규모로 진행하고 있는 '에코델타시티' 사업도 난항이 예상된다. 국토교통부 산하 국토연구원은 이 사업의 이익금을 2513억 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애초 수공이 예상한 6000억 원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다. 수공이 현재 추산하고 있는 당기순이익은 1천억 원 수준. 이 자체 순이익만으로는 3천억 원에 이르는 수공 부채(4대강 투자비) 이자도 갚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수공은 올해까지 재정지원방안을 확보하지 못하면 수공 부담액을 전액손실처리를 해야 해 천문학적인 회계 손실을 입게 된다며 정부에 재정지원방안 마련을 촉구했다. 즉, 수공 부담액을 전액 손실처리 하면 신용등급 하락으로 신규차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호소 및 위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수공은 무모한 국책사업으로 인한 공기업 부실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수공 외에도 국책사업으로 부채가 증가한 공기업으로 LH공사(토지주택공사)가 있지만, 단기간에 부채가 급증한 수공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지난 2009년 9월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결정한 바에 따라 수공의 부채 발행이 이루어졌다. 이는 국가가 직접 빚을 내지 않았을 뿐, 사실상 대리한 것과 같다. 국책사업으로 수공에 전가된 부채가 결국 직접 부채 요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수공의 재정지원 요구는 예견된 일이었다. 당시 정부가 이자는 전액 정부가 보전하고 원금은 자체 수익으로 우선 충당한 뒤, 못하면 예산을 지원한다는 규정을 두어 '수공의 빚을 떠안게 될' 가능성을 열어뒀기 때문이다.

빚더미에도 인력 늘리고 사업 확장한 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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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자원공사와 부산시가 부산 강서구 강동동 일대에 조성을 추진하고있는 에코델타시티 (친수구역 조성사업) 조감도
ⓒ 국토해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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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수공은 정부가 해야 할 사업을 떠안아 재정 위기에 놓인 피해자인 걸까? 지금까지의 내막을 보면 그렇지 않다. 2013년 한국 사회공공연구소가 내놓은 '한국의 물정책, 시장화의 문제점과 공공수도 대안'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수공의 비정규직은 2013년 현재 492명으로 4대강사업이 시작되기 전인 2008년 292명에 비해 70%가 늘어났다. 4대강사업과 경인아라뱃길사업, 위탁상수도 사업 확대 등으로 인해  고용을 증가 시켰기 때문이다.

더구나 2008년 한 명도 없던 무기계약직은 276명으로 늘었고, 정규직도 4018명에서 4096명으로 78명 증가했다(2013년 기준). 한 마디로 사업 확장을 이유로 인원을 554명이나 늘린 것이다. 여기에 신설된 자회사 인원까지 합하면 천여명에 육박하는 상황이다. 국책 사업으로 빚이 급증한 와중에도 예산과 조직을 늘리는 관료적인 행태를 보인 것이다.

조직을 키우려는 모습은 인력 증가 뿐만아니라 자회사 신설로도 나타나고 있다. 수공은 지난 2011년 워터웨이플러스라는 자회사를 설립했다. 경인아라뱃길의 효율적 운영관리, 4대강문화관 운영을 위해서 설립했다고 수공은 밝혔다.

하지만 관광레저와 마리나 수익으로 자회사의 운영비용을 충당하기에는 부족한 실정이다. 예산정책처도 지난 2012년 공공기관 결산평가에서 공사의 여건과 운영비용을 감안해 운영효율화 방안을 수립하라고 지적했다.

수공의 위기, 4대강 부채때문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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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공은 2010~2013년 동안 6개 단지(시화MTV, 송산그린시티, 구미확장단지, 구미하이테크, 여수확장단지, 구미디지털) 개발 사업에 모두 2조6987억 원을 투자했으나, 9772억 원의 투자액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다.
ⓒ 한국수자원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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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공은 건전하던 재정이 4대강 사업 때문에 부실해졌다고 주장한다. 맞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진실은 아니다. 수공은 각종 개발사업도 방만하게 진행하고 있다. 공공기관의 국가산업단지 개발 현황을 보면, 2008년 이후 36개가 지정됐다. 이는 전체 산업단지의 37.4%에 달한다.

지난달 4일, 국회예산정책처의 '2013회계연도 공공기관 결산 평가 보고서(아래 공공기관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전국의 산업단지는 대부분 분양이 저조해 수익성이 매우 떨어지는 상황이다. 따라서 전국 산업단지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앙정부 산하 공공기관의 국가산업단지도 심각한 재정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수공은 2010~2013년 동안 6개 단지(시화MTV, 송산그린시티, 구미확장단지, 구미하이테크, 여수확장단지, 구미디지털) 개발 사업에 모두 2조6987억 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회수 금액은 1조7215억 원 수준. 9772억 원의 투자액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이 부분도 고스란히 수공의 재정부담으로 이어질 것이다. 수공의 부실경영 문제가 단순히 4대강때문만이 아닌 이유다.

그리고 또하나 경인아라뱃길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수공은 보상비 3222억 원, 추가보상비 1273억 원, 경관도로 무료화로 인한 수입손실 1897억 원을 포함해 총 6392억 원의 국고 지원을 정부로부터 받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경관도로 무료화로 인한 수입손실 1897억 원이 국고로 지원될 가능성은 낮다. 만약 정부가 이 부분을 보전해 준다면 선례가 생겨 다른 부분에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와 수자원공사는 이 사업도 4대강 사업처럼 수익을 남길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이외에도 수익을 낼 것으로 예상했던 물류 단지도 분양실적 및 항만운영수익이 저조하여 막대한 적자가 예상될 것으로 공공기관 평가 보고서는 전망하고 있다. 물류단지 전체 분양금액은 7637억 원으로 김포물류단지의 분양률은 83.5%이나 인천물류단지의 분양률은 57.2%에 불과하다.

특히 상대적으로 분양 실적이 저조한 인천물류단지는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항만운영수익은 부두임대수익, 시설임대수익, 마리나 운영수익으로 구성되는데, 현재까지의 항만운영수익은 121억 원으로 투자비 회수 계획대비 2.0%에 불과하다. 갈수록 태산이 셈이다.

수공 경영개선 타개책으로 군불 지피는 물값 인상론

친수구역개발과 함께 수공이 추진하는 게 수도요금 인상이다. 2013년 한국 사회공공연구소가 내놓은 '한국의 물정책, 시장화의 문제점과 공공수도 대안' 보고서에 따르면, 수공이 경영 개선을 위해 2004년부터 운영해 오던 지방상수도 위탁 사업을 현행 21개에서 162개로 확대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물론 지자체가 상수도를 위탁하게 되면 부담은 증가한다. 그럼에도 지자체가 상수도를 위탁하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관리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고, 상수도의 인력만큼을 다른 곳에 유용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수공 또한 당장 큰 돈은 남지 않더라도 인력을 늘릴 수 있고, 무엇보다 수공의 가장 중요한 재산인 물을 팔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이해가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게 '윈윈' 하는 결과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가장 먼저 위탁을 실시했던 충남 논산시의 경우 2003년 톤당 709원하던 수도요금이 2010년 883원으로 25% 인상되었다. 2012년에도 15% 추가 인상됐다. 경기도 양주시도 법적 싸움을 벌이고 있다. 양주시는 지난 2008년 수공과 20년간 위탁하기로 협약했으나, 재정이 악화되는 등의 부작용을 이유로 2012년 위탁해지를 통보해, 수공이 소송을 제기했다.

언론보도 내용에 따르면, "지난 2월 현재 양주시의 물값은 전국 최고 수준으로 인근의 의정부시보다 40% 비싸다. 양주시가 수공과의 소송에서 지게 되면 4~5년 후에는 물값이 2배 가까이 폭등할 것으로 우려"되는 실정이다. 그러나 해당 소송에서 법원은 1심과 2심 모두 수공의 손을 들어줬다. 또다른 위탁 자치 단체인 동두천시도 2008년 한 해를 제외하고는 매년 적자를 보고 있다. 

시대의 소명 다한 개발공기업 수공, 건설적으로 해체해야

이대로 두면 2017년에는 수공의 부채가 19조원까지 증가하게 된다. 아마도 결국 국민들의 돈으로 갚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공기업의 주인은 누구인가? 국민이다. 빚을 낼 때는 아무런 권한도 없는 국민이 빚을 갚을 때는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주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건 '물주'다. 아무 권리도 없이 빚만 갚아주는 건 주인이 아니라 물주다. 흑자가 나도 배당도 받지 못하는 그야말로 바보 물주들인 셈이다.

따라서 제안한다면 첫째, 선 책임 후 대책이다. 책임의 소재와 원인규명을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상황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납세자 소송을 도입하자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정치적인 책임규명이라도 정확히 해야 한다.

둘째, 수공도 책임을 져야 한다. 밑빠진 독에 계속 물을 부을 수는 없다. 4대강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지금까지 수공이 개발공기업으로서 벌인 문제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함께 책임지는 모습도 보여주어야 한다. 조직과 예산을 늘리는 현재의 모습에 메스를 대야한다는 말이다.

셋째, 수공의 '해체'다. 수공은 대표적인 개발공기업이다. 개발공기업은 이제 시대의 소명을 다했다. 대부분의 댐이 완성되었고, 지자체와 민간기업이 성장했다. 불필요한 사업을 계속 벌이는 것은 불필요한 조직이 존재하기 떄문이다. 따라서 지금 수공의 자산을 매각해 최대한 빚을 갚고, 4대강 유역별로 쪼개어 개발기업이 아니라 관리를 위한 조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모든 조직은 관료화된다. 따라서 시대의 변화에 맞게 조직을 바꾸어 주지 않으면 조직은 계속 하던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위기가 기회다. 부채로 인해 조직의 존폐가 걸린 상황이 오히려 수공을 건설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물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나라살림연구소장이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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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과 거꾸로 가는 영리병원(64)

 

정창수

2009-12-21 16:50:22

인간사회는 언제나 죽음과 병이라는 위협에 대한 대처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질병에 대한 치료를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전쟁과는 비교도 안 될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쓰려져 갔고, 때문에 인구감소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의료행위가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은 이집트이다. BC2700년경에 만들어진, 비석에 쓰여진 내용에 의하면, 이미 의사와 치과의사를 구분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의 의학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보면, 이집트에서는 의학서에 쓰여진 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중범죄로 처벌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인들에게 “이집트같은 선진국처럼”이라면서 발전된 사회시스템을 찬양하기도 했다. 당시의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물리치면서 절정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유럽중심의 사고방식이 유럽인들의 의도에 의해 편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전된 이집트의 의학은 그리스로 전해지면서 서양의학의 모태가 된다. 역사상 최초의 의사로 기록되어있는 사람은 임호텝(Imhotep)이다. 그는 BC2600년경 이집트의 대신이었고, 피라미드를 설계하기도 했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이들이 부자들의 호출에만 응해서 치료했다고 해서 이들을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국가가 공공성을 가지는 의사의 활동을 통제했다는 것이 된다. 요즘과 마찬가지로 의사들은 돈과 권력에 대해 유혹을 받은 것이고, 국가는 이를 공적영역으로 되돌리려고 한 것이다. 아마도 이는 영원한 숙제일수도 있다.

그리스에 의료기술이 전달되면서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의사가 등장한다. 물론 자유민들에 국한되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에 대해 의료행위를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술을 전수해준 이집트에 대한 선망은 매우 높아서 이집트 유학을 한 의사들이 최고로 인정받았고, 소크라테스의 ‘선진국 이집트’에 찬양도 그런 배경이 작용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BC2600년경의 왕인 황제(黃帝)가 의학교과서인 내경(內徑)을 만들어 의학을 확립했다. 그런데 유럽과 중국, 양 문명의 의학은 다른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은 외과적이고 해부학적인 것이 좀 더 중심이라면 동양은 몸에 칼을 대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 때문에 약재 중심으로 발전해온 점이 다른 점이다.

이러한 의학의 발전은 동서양 모두 상류층에 국한한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일반인들은 방치되거나 주술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공히 공공의료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전염병이 창궐할 때에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과학의 발전과 국민국가의 형성으로 대중의료의 필요성이 증대하면서 극복되기 시작한다. 18세기만 해도 유럽의 병원에는 의사가 없었다. 당시 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환자를 수용하는 곳이었다. 일종이 격리였다. 감옥과 병원은 그들을 격리시키는 곳이지 치료하는 곳이 아니었다. 근래에 이르러 수용이 교정과 치료로 그 개념이 바뀐 것이다.

이 기준에서 보면 중국이나 우리나라 등은 공공의료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았다고 할수 있다.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중국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공공의료정책을 시행했다. 삼국시대에 약부(藥部)나 약전 등의 기관을 설치하여 의료정책을 시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의사를 일본에 파견하기까지 하였다. 고려에 이르러서는 각 군현에 약점(藥店)을 두고 의사를 배치했다. 이때 이미 과거로 의사를 선발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독창적 의서 동의보감의 발간 이후로 시골 마을마다 균일화된 의료가 보급될 수 있었다. 더구나 왕실은 국고는 물론 비자금인 내탕금까지 동원하여 백성들의 의료를 위해 노력하였다. 가난과 질병은 국가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러한 전통 때문인지 북한은 공공의료에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그래서 1982년에는 무상의료에 415명당 의사 한명씩을 배치하고, 의사담당제를 두어 책임지게 하였다. 당시 세계의 일부 지식인들이 북한에 대해 극찬을 한 이유 중에 공공의료의 완비가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체제가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의 상황이다. 현재 북한의 의료상황은 절망적이다. 공공의료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의료물품 마저 없어 응급처치조차 못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타미플루 지원문제도 그런 상황이 작용한 것이다.

남한도 건강보험제도의 완비로 세계에서 가장 건전한 재정을 유지해 왔다. 전 국민을 건강보험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최근 영리병원 허용문제가 정치적인 논란이 되고 있다. 인류의 영원한 숙제였던 의료의 공공성을 애써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람들의 의도가 못내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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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경부고속도로건설을 왜 반대했을까 

 

 

우리나라의 산업근대화의 시점을 잡으라면 아마도 경부고속도로개통을 그시점으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않을 것이다. 1970년 7월7일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세계역사상 가장싸게 그리고 가장 빠르게 건설되었다. 429km를 건설하는데 429억원이 들어가서 당시 일본 동명고속도로의 8분의 1수준이었다. 거기다가 1968년 12월1일이 공식착공일이었으니 19개월만에 완공한 셈이다. 이러다보니 부실공사가 되어 1990년 말까지 보수비만 1,527억원으로 건설비의 4배가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 자체는 허술했지만 ‘다이나믹 코리아’의 상징이었고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측면은 부정할 수는 없다. 제대로 했다면 12년은 걸렸을 거라고 한다. 더군다나 이사업은 격렬한 정치적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히 추진한 박정희 리더쉽의 대표적 사례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신화의 대표적 상징이다. 박정희독재에 대한 향수는 그런 결단이 우리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기억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기억이든 사실과 진실이 다를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진실은 이렇다. 우선 반대가 많지 않았다. 고속도로건설은 1967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의 대선공약으로 발표되었고 직후 여론조사 결과 68%무조건 찬성, 27%가 조건부찬성, 반대는 5%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 고속도로 건설당시에 일반국민들은 애국심으로 용지대금을 낮출 정도였다. 582만 7,000평의 용지대금으로 지급된 총액이 18억 7,667만 3,000만원으로 평당 236원에 매수했다. 당시 담배한갑에 40원(파고다), 쌀한가마에 4,350원하던 때였다.

 

찬성여론이 다수였다 하더라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지역균형발전이었다. 세계은행의 자매기구인 국제개발협회가 “경부고속도로같은 남북종단도로보다는 횡단도로가 더 시급하다”라며 차관지원에 난색을 표한 것도 바로 그 문제였다.


따라서 호남을 중심으로 편향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6대 대통령선거때 박정희후보의 호남선복선화공약의 이행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와 같이 착공된 호남선복선화 공사는 36년이걸린 후 2004년에야 완공되었다. 어느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정권교체전까지 영남과 호남의 예산투자액수가 10대1이었다고 한다.

 




결국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재원배분 논쟁이었던 셈이다. 고속도로가 경제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 시기와 방식에 대한 논란이었다. 당시 반대진영의 논객은 건설위원회 소속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이 돋보였다. 당시 그는 호남의 이익만 옹호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의 보고서를 근거로 서울-부산간에는 철도망과 국도·지방도가 잘 갖추어져 있으므로 오히려 서울-강릉간 고속도로를 가장먼저 건설해야한다고 주장했다.강원도에는 지하자원과 관광자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예철도조차 없다는 이유였다. 아마 이 주장대로 되었다면 해안은 교통시설이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으므로 지금의 현실과는 다른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급속한 성장에 대한 우려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시대를 앞서 고민한 흔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때 반대에 앞장섰던 김영삼의원이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는 경부고속도로가 4차선밖에 안돼어서 문제가 많다며 박정희 정권을 비난한 것이다. 그분의 스타일이야 익히 아는 바이기에 놀라지는 않지만 마치 개그를 보는 것 같다.

 

그러면 박정희대통령이 급속히 추진했던 진짜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1971년 대통령선거때문이었다. 대통령선거 전에 공사를 완공시켜기 위해 무리한 공사를 진행시킨 것이다. 또한 경제적 고려도 있었다. 경제개발의 본격화로 인한 철도수송의 과포화와 울산정유공장건설이후 공급과잉상태에 놓인 아스팔트를 처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최근 이명박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 자리에서 경부고속도로도 반대가 많았지만 결국 지금은 지지를 받지 않았느냐며 4대강사업 추진을 강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4대강사업은 다수가 반대하고 그 결과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고, 그 결과가 불을보듯 뻔한 사업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청계천이 있다. 청계천도 반대가 많았지만 강력히 추진한 결과 성공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둘다 잘못된 기억이다. 청계천도 환경단체들은 물론 진보신문이라 그들이 이야기하는 한겨레신문까지 지지하였다. 문제제기는 추진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이 한겨레신문에 몇 안되는 글 중 하나를 기고하기까지 하였다.

 

문제는 잘못된 기억 때문에 지금 욕을 먹어도 훗날에는 찬양받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역사에서는 영원히 욕을 먹는 일이 훨씬많다는 사실을 그분은 모르는 것 같다. 더구나 이런 기억력으로는 나중에 자신은 사실 반대하려고 했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을까. 김영삼대통령처럼 개그를 시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사고가 너무크다. 우리의 고통도 너무도 막대하다. ‘잘못된 기억’은 ‘잘못된 미래’가 될수도 있다.

 

 

* 이 글은 시민의 신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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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부흥-세종이 만들었다 

 

 

600년전 조선의 출산휴가

우리나라는 법으로 직장에 다니는 임산부에게는 출산휴가를 주도록 되어 있다. 물론 잘 지켜지지는 않는다. 여성에 대한 편견과 출산을 개인의 문제로 보는 시각, 여하튼 복지를 적대시하는 이념적 성향까지 다양한 장애물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600년전 조선에서도 출산휴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 주인공은 세종이다. 1426년, 세종8년에, 관청의 계집종이 아이를 낳으면 백일의 휴가를 주었으며 이것을 법에 명시하도록 형조에 지시했다. 이때 세종의 나이 29세이니 이많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군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로부터 3년 후에는 산전휴가 30일을 더 주도록 하고 있다. 그러니 130일의 출산휴가다.

 

내용을 보면 “옛날에는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출산하고 나서 7일간 쉬게 하였다. 아이를 내버려두고 일하면 어린아이에게 해가 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백일의 휴가를 주었다. 그러나 출산시기에 가까워 일하다 몸이 지치면 집에 가기 전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어 산모와 아이의 건강이 걱정된다. 법으로 출산 전 1개월을 쉬게 하라. 속이려 들더라도 1개월이야 넘겠는가”라고 되어 있다. 배려와 혜안이 놀랍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남편들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다는 것이다. 4년 뒤인 1434년에 “여종이 아이를 가졌거나 산후 백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는 일을 시키지 말고 휴가를 주라고 했다. 그러나 그 남편에게는 전혀 휴가를 주지 않고 일을 하게 하여 산모를 돌볼 수 없게 되니, 이는 부부가 서로 돕는 뜻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이 때문에 이따금 목숨을 잃는 일도 있어 진실로 가엾다 하겠다. 이제부터 사역인의 남편도 산후 30일간 쉬게 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 내용은 조선의 기본법인 경국대전에도 규정된다.

 

출산휴가는 세종의 의지

남편에게 육아휴가를 주는 것은 선진국도 최근에야 실시한 것으로서 세종대왕의 이런 조치는 아마도 세계 최초일 것이다. 그나마 대부분의 나라는 대부분은 태아의 건강을 생각하는 정도였다.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700년대)에는 태아를 유산시키는 아내를 처벌하고, 산모의 생명이 위태롭다고 해도 아이 낳는 일을 포기할 수 없도록 규정했던 기록이 있다. 스파르타의 경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그나마 이것도 드문 사례일 뿐이다.

 

우리 노동법에는 산전, 산후 모두 합해 90일의 출산휴가를 보장하고 있다. 또한 정부가 급여의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를 외면하고 있어서 이것을 이용하는 사람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공공기업이나 공무원이 대부분이다. 조선시대에도 공노비들이 이 혜택을 우선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전통을 지키려는 차원(?)이 아닐까하는 묘한 생각이 들기도 하다.

 

그런데 세종이 이런 정책을 편 것은 단지 어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국가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다. 인구가 늘어야 국가의 부가 늘어나는 것은 고금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지배층들도 이것을 칭송했다.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는 현재의 기득권세력과는 달랐다. 이것이 조선 초기에 국가가 엄청나게 발전했던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든든한 재정이 원인-공법

이러한 세종의 복지가 가능했던 이유는 재정이 튼튼했기 때문이다. 튼튼한 재정은 공평한 조세제도 덕분이다. 공법이라 불리는 세종의 조세제도는 중국의 하나라에서 시행했다는 전설의 조세인데 일정한 땅을 농민에게 나누어주고, 그중 10분의 1의 땅에서 나온 수확을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고정비율의 세금이다.

 

이전에는 고정액을 바치는 제도였다. 고정액을 바치면 조세가 상향평준화 된다는 문제가 있다. 관료들은 실적 때문에 더 많이 거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 공평하고 정밀한 세금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행정적인 측면에서 세계역사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제도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을 이런 정책을 결정하는데 여론조사를 시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12년인 1430년 공법 시안에 대해 찬반을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무려 172,468명의 의견을 묻는 최초의 여론조사가 있었다. 이때 조선인구가 대략 6백만으로 보는데 절반이 노비인 것을 감안하면 3가구 중 1곳은 조사에 응한 것이다.

 

결과는 찬성 98,657명, 반대 74,149명으로 찬성이 57%였다. 조사기간은 무려 5개월이었고 조사방법은 1대1면접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결과는 상대적으로 땅이 비옥한 영호남은 찬성이 반대를 압도하였고 척박한 서북지역은 정반대였다. 또한 3품이하 하급관리들은 찬성이 많고 고위관리들은 반대의견이 많았다. 지역별, 계층별로 이해 관계에 따라 의견이 갈린 것이다. 공법은 반대 의견을 계속 수렴해서 제안된지 17년만에 연분 9등법 등으로 절충되어 실시된다. 그리고 우리세법의 기본이 되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당시의 재정은 세종때는 1년에 4백만석의 생산을 기록하고 1년 비축미만 125만석이 될 정도였다. 선조이후에는 정부의 1년 세입이 대부분의 기간동안 쌀, 콩, 조를 통틀어 23∼24만 석에서 50만석을 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대단한 국가재정상태였다. 여진족부대를 운영하고, 대마도를 정벌하며, 한글을 연구하기 위해 인도와 위구르까지 연구진을 파견하는 능력은 이런 국가재정의 힘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의 부흥은 세종시대에 이루어진 셈이다. 그리고 그 성군은 훌륭한 정책에서 나왔고, 그 정책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합의를 이끌어냈던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다. 갑갑한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12년전으로 후퇴한 것이 아니라 600년전으로 후퇴한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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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의 저출산


고대 도시국가 스파르타가 몰락한 가장 큰 원인은 인구감소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인구감소의 원인으로 토지 체계를 들었다. 스파르타는 한때 보병과 기병 3만명을 먹여 살릴 수도 있었지만 말기에는 1천명도 감당하지 못했다.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쇠망한 것이다.

 

스파르타도 처음에는 인력난 때문에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그것은 강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절정기부터는 문호가 닫힌다. 거기다 더하여 부의 집중문제가 있었다. 인구증가를 위한 법은 있었다. 당시 자녀 셋을 두면 노동에서 면제되고, 넷을 두면 세금까지 면제되었다. 하지만 경제문제라는 본질을 회피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인구가 늘면서 토지가 분할되자 상당수는 빈곤해졌다. 그래서 부유층은 재산유지를 위해 출산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그래서 경제력이 집중되었다. 때문에 토지를 소유한 가문이 3세기 즈음에는 토지를 소유한 가문은 100여 개에 불과하게 된다. 물론 외국인을 유입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경제문제가 가져온 인구감소가 스파르타를 몰락하게 만든 것이다.

 

스파르타에서는 새로운 사람들이 부유층으로 집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스파르타는 이런 배타적인 정책 때문에 스스로 절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긴밀한 결합으로 자신의 계급을 유지하려는 정책과 일종의 산아제한, 가족규모제한, 독신주의 횡횡 등도 인구가 감소하는 원인이었다. 이에 반해 영국 귀족계급은 가문이 끊기고 작위가 단절되어 귀족의 수가 줄어들자 새로운 작위를 수여함으로써 그 세력을 유지했다.

 

 

 

로마시대에서도 인구감소 문제가 심각했다. 그라쿠스 형제가 10남매였듯이 기원전 2세기에는 다산多産이 일반적이었지만 기원전 1세기경에는 출산이 급격히 감소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간통법과 혼인법을 제정해서 자유연애를 범죄로 규정하고 이혼했거나 결혼하지 않은 독신여성에게는 상속을 금지하는 등 재산 소유를 제한했다. 비슷한 상황의 남자는 공직에 진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실효는 없었다. 자유민이 몰락한 것이다. 그럼에도 로마는 스파르타와 달랐다. 아프리카인이 황제가 될 정도로 개방적인 사회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인구감소를 많이 우려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고조顧助(보살피며 도와줌)라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결혼하지 못한 처녀를 조사해 그 연유를 기록한 후 혼인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능력이 있음에도 시집을 보내지 않으면 국문을 하기도 했다.

 

부자들은 재산 감소를 우려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부양 능력이 없어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부유해져서 인구가 감소한다는 것은 한 면만 본 것이다. 대부분은 양육 같은 경제 문제가 핵심이다. 그래서 근대 이전의 국가에서는 출산장려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최근 출산감소가 국가적인 문제로 등장했다.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산아 제한을 했다고 호들갑이더니 이제는 온통 인구감소 걱정들이다. 노 대통령은 선거 당시 “아이는 제가 키워주겠다”고 했다. 출산장려의 핵심은 육아문제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에서는 저출산 현상을 편한 것만을 찾는 풍조로 돌리고 있다.

 

부유해지면 인구가 감소한다는 것은 일면을 본 이야기이다. 사회불안정도 인구감소의 원인이다. 최근 러시아는 급격한 인구감소를 보이고 있는데 그 결정적 요인은 경제불안 의료체계의 붕괴 등 사회불안이라고 한다. 공동체의 활력과 인구증가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인구감소로 인한 위기가 닥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폐쇄성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흑사병과 같은 커다란 재앙이 아니고서는 아무리 인구가 줄었다 한들 전체가 줄어드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우리는 폐쇄적인 단일민족 혈통주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마저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외국인노동자을 대하는 태도는 인권의 문제뿐 아니라 국가의 존망과도 연결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다른 시각도 있다. 저출산이 오히려 우리사회의 아름다운 환경으로 바꿀수 있다는 것이다. 인구가 줄어 보다 인간적인 사회가 될수 있다는 것이다. ‘자발적 인류멸종운동’(VHEM)을 벌이는 이들도있다.

 

이번 2010년 예산안을 보면, 예산의 변화가 눈에 띄지 않는다. 저출산 대책은 말뿐이었음을 알수 있다. 혹시 이 정부는 자발적 민족멸종운동의 이념을 지지하는 것은 아닐까? 설마 공동체의 미래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이글은 시민의 신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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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포퓰리즘과 나쁜 포률리즘

 

 

미국에서 시작된 포퓰리즘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 있다.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 행태를 가리키는데, 다른 말로 대중주의라고 하기도 한다. 요컨대 일반 대중을 정치의 전면에 내세워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포퓰리즘이라는 말의 어원은 1891년 미국에서 결성된 포퓰리스트 정당인 인민당(People's Party)에 있다. 인민당은 당시 미국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에 대항하기 위해 농민과 노조의 지지를 기반으로 창당됐다. 당시 소외받던 흑인과 백인 농부를 지지 기반으로 한 이 당은, 1892년 대통령선거에서 1백만 표를 얻어 몇몇 주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을 누르고 승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문제에 대해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민주당이 개혁하면서 점차 세력이 약해졌다.

보통 정치 지도자들은 정치 엘리트나 적대 세력이 저항하면 국민에 직접 호소해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개혁을 내세우는 한편으로 정치적 편의주의나 기회주의에 편승해 권력을 공고히 할 가능성이 있다. 이럴 때 이런 사람을 경멸하는 의미로 퓰리스트라고 부른다. 포퓰리스트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 대중들이 좋아하고 겉모양만 번지르르한 개혁을 내세우며, 그래서 인기에 영합하는 비합리적인 정책을 내세워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포퓰리스트의 대표적인 인물로 아르헨티나의 후안 도밍고 페론(1895~1974)을 든다. 페론은 지금도 끝없이 추락하는 아르헨티나 경제를 일컫는 아르헨티나병을 만든 장본인으로 지목받고 있다. 1940년대에 세계 5대 부국에 들던 아르헨티나가 1945년 페론 대통령이 집권하고 포퓰리즘식 퍼붓기 분배정책을 펴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복지 지출을 마구 늘린 반면 소득세는 내렸고, 그 결과 재정적자가 쌓여갔다. 몇몇 정권이 이런 상황을 개혁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강력한 노조의 총파업 등 민중의 저항을 받아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파탄에 이르게 됐다는 주장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 나라에는 아르헨티나병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억울한 개혁적 포퓰리스트 페론

그런데 이런 시각은 잘못된 편견이다. 아르헨티나 문제 뒤에는 독특한 역사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한 백인국가다. 하지만 사회구조는 다른 혼혈국가와 차이가 없다. 지가상승과 농지확장으로 생겨난 부를 지주과두제 세력이 대부분 가져버렸고, 그 돈은 런던의 금융가에 고스란히 건네졌다. 이 과두제 세력이 문제의 핵심이다. 땅은 넓고 자원은 풍부한데 땅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고, 대다수 국민들은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개혁을 내세운 페론이 각광을 받았다. 전국 토지의 3분의 1을 토지개혁을 통해 분배했다. 아르헨티나에 비로소 중산층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페론정권 시절이 그나마 가장 안정된 시기가 됐다. 외채도 별로 없었다. 그 결과 소비가 촉진되고, 아르헨티나는 세계 5위의 경제력을 구가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농업국이던 아르헨티나를 공업국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 시작됐다. 이런 결과 페론은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최근 백 년간 아르헨티나에서 임기를 모두 마친 몇 안 되는 대통령 중 하나가 됐다.

페론정권의 문제는 경제보다는 정치에 있다. 페론주의는 특정한 이념이 아니다. 그래서 언론에서 즐겨 쓰는 포퓰리즘이나 페론주의는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다. 페론에게 잘못이 있다면 정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회에 자리잡은 뿌리 깊은 적대감을 자신의 상징으로 하는 구도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결국 해결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사실 지금의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는 군부정권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페론을 몰아내고 미국 등의 지원을 받아 집권한 군부독재 세력은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경제의 외국종속을 심화시켰다. 외채만 해도 페론정권 때는 96억 달러에 그쳤지만, 끊임없이 늘어나 1500억 달러에 이르게 된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도로건설권, 석유채굴권은 물론 주민등록증 발급업무까지 외국기업에 넘길 정도로 과격한 국영기업 매각을 추진했다. 하지만 시장개방, 내핍정책과 지나친 이자 부담, 소득불균형 심화, 채무증가, 그리고 IMF 구조조정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우리나라에도 포퓰리즘 한번 있어봤으면

모든 정치인은 포퓰리스트라는 말이 있다. 정치를 정의하는 현실적인 명제다. 지지를 받지 않고 정치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자원이 풍부하다. 그런데도 사회 내부의 갈등은 심각했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포퓰리즘이 문제가 아니라 노블리스오블리제가 문제인 것이다. 전체 인구의 절반인 1800만 명이 월소득 245달러를 밑도는 빈민층이다. 페론 시대에 형성된 중산층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다. 페론을 그리워하는 페론현상이 생겨난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의 주요 언론들은 반복되는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의 원인을 페론주의에서 찾고 있다. ‘경제적 포퓰리즘과 노동계급의 무리한 요구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아르헨타의 계속되는 경제위기는 경제개방과, IMF의 권고를 너무 충실히 따른 결과다. 지하의 페론이 억울해 할 일이다.

우리 보수세력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진실을 왜곡한 것이다. 정책이 인기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과 옳느냐 그르냐 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 옳은 정책을 국민들이 지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대중을 경멸하는, 엘리트주의에 물든 사고방식이다. 더구나 그 엘리트들은 기득권까지 가지고 있다.

포퓰리즘은 인기에 영합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말고도 소수의 지배집단이 통치하는 엘리트주의와 대립되는 민중주의라는 또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이다.

보수세력은 노무현 정권을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은 너무나 반포퓰리즘이어서 문제 아니었을까? 진짜 문제가 있다면 대립을 정치공학적으로 이용한 측면이다.

문제는 지금의 정권도 반포퓰리즘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포퓰

 

리즘과 마찬가지로 반포퓰리즘에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지난 2년이었다. 그래서 말하고 싶다. 어째 포퓰리즘 한번 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이 글은 시민의 신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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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속의 포퓰리즘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 있다.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 행태를 가리킨다. 포퓰리즘이라는 말의 어원은 1891년 미국에서 결성된 포퓰리스트 정당인 인민당People's Party에 있다. 인민당은 당시 미국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에 대항하기 위해 농민과 노조의 지지를 기반으로 창당됐다. 당시 소외받던 흑인과 백인 농부를 지지 기반으로 한 이 당은, 1892년 대통령선거에서 1백만 표를 얻어 몇몇 주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을 누르고 승리하기도 했다.

 

보통 정치 지도자들은 정치 엘리트나 적대 세력이 저항하면 국민에 직접 호소해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개혁을 내세우는 한편으로 정치적 편의주의나 기회주의에 편승해 권력을 공고히 할 가능성이 있다. 이럴 때 이런 사람을 경멸하는 의미로 ‘포퓰리스트’라고 부른다. 포퓰리스트들은 인기에 영합하는 비합리적인 정책을 내세워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대다수 언론에서는 포퓰리스트의 대표적인 인물로 으레 아르헨티나의 후안 도밍고 페론(1895~1974)을 든다. 페론은 심각한 아르헨티나 경제를 일컫는 ‘아르헨티나병’을 만든 장본인으로 불리운다. 1940년대에 세계 5대 부국에 들던 아르헨티나가 1945년 페론 대통령이 집권하고 포퓰리즘식 퍼붓기 분배정책을 펴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복지 지출을 마구 늘린 반면 소득세는 내렸고, 그 결과 재정적자가 쌓여갔다. 몇몇 정권이 이런 상황을 개혁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강력한 노조의 총파업 등 민중의 저항을 받아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파탄에 이르게 됐고, 이런 까닭에 우리 주변에는 ‘아르헨티나병’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시각은 잘못된 편견이다. 진실은 다르다. 지가상승과 농지확장으로 생겨난 부를 지주세력이 대부분 가져버렸고, 그 돈은 런던의 금융가에 고스란히 건네졌다. 이 과두제 세력이 문제의 핵심이다. 땅은 넓고 자원은 풍부한데도 땅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고, 대다수 국민들은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개혁을 내세운 페론이 각광을 받았다. 전국 토지의 3분의 1을 토지개혁을 통해 분배했다. 아르헨티나에 비로소 중산층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페론정권 시절이 그나마 가장 안정된 시기가 됐다. 외채도 별로 없었다. 그 결과 소비가 촉진되고, 아르헨티나는 세계 5위의 경제력을 구가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농업국이던 아르헨티나를 공업국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 시작됐다. 이런 결과 페론은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지난 백 년간 아르헨티나에서 임기를 모두 마친 몇 안 되는 대통령 중 하나가 됐다.

 

페론정권의 문제는 경제보다는 정치에 있다. 페론에게 잘못이 있다면 정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뿌리 깊은 적대감을 자신의 상징으로 하는 구도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결국 해결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지금의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는 군부정권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페론을 몰아내고 미국 등의 지원을 받아 집권한 군부독재 세력은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경제의 외국종속을 심화시켰다. 외채만 해도 페론정권 때는 96억 달러에 그쳤지만, 끊임없이 늘어나 1500억 달러에 이르렀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도로건설권, 석유채굴권은 물론 주민등록증 발급업무까지 외국기업에 넘길 정도로 국영기업을 매각했다.

 

모든 정치인은 포퓰리스트라는 말이 있다. 정치를 정의하는 현실적인 명제다. 지지를 받지 않고 정치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전체 인구의 절반인 1800만 명이 월소득 245달러를 밑도는 빈민층이다. 페론 시대에 형성된 중산층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다. 페론을 그리워하는 페론현상이 생겨난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의 원인을 페론주의에서 찾고 있다. ‘경제적 포퓰리즘’과 노동계급의 무리한 요구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지하의 페론이 억울해 할 일이다.

 

정책이 인기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과 옳느냐 그르냐 하는 것은 다르다. 옳으면서도 인기 있는 정책이 있고, 옳지도 않고 인기도 없는 정책도 있다. 옳은 정책을 국민들이 지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대중을 경멸하는, 엘리트주의에 물든 사고방식이다. 포퓰리즘은 엘리트주의와 대립되는 민중주의라는 또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이 최근“인기를 끌고 인심을 얻는 데는 관심이 없으며, 대한민국을 선진화하고 모든 분야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다는 단단한 각오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대강이나 세종시반대등의 정책을 독선적으로 이어가겠다는 이야기다. 이해할 수 없는 대단한 신념도 문제지만 엘리트주의까지 가진것 같아 경악스러울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분이 엘리트처럼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칼럼은 2008년 시민의 신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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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바르 동맹

 

아메리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메리카합중국, 즉 미국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미국이 아닌 다른나라들이 많고 그들은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문화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말을 대단히 싫어한다. 미국중심의 사고방식을 갖는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앵글로아메리카와 라틴 아메리카로 구분한다. 이는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유래와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남미의 꿈 볼리바르

미국독립혁명의 상징이 워싱턴이라면 라틴아메리카 독립혁명의 상징은 ‘시몬 볼리바르(1783~1830)’이다. 보통 ‘해방자(el Liberator)’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볼리비아라는 국가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봅리바르는 남미 공동체의 국부의 개념으로 추앙받는다.

볼리바르는 베네주엘라의 카라카스에서 부유한 에스파냐 가계(家系)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다른 귀족들이 그랬듯이 유럽에서 교육을 받고 베네수엘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편한 삶을 버리고 험난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811년 독립전쟁이 실패한 후 4차례에 걸친 망명에도 굴하지 않고 군사행동을 계속 지휘한다. 마침내 1819년 뉴그라나다(New Granada:콜롬비아)를, 1821년 베네수엘라를, 그리고 1822년 키토(Quito:에콰도르)를 에스파냐로부터 해방시키고, 3국을 합한 대콜롬비아공화국을 수립하여 그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1823년 페루의 독립운동가 산 마르틴의 요청을 받고 페루로 건너가 1824년 페루에 남아 있던 에스파냐군을 격파하여 그의 지배하에 두었다. 또 페루 북부(볼리비아)에 남아 있는 에스파냐군의 잔당을 그의 부하 수크레에게 소탕시키게 하여, 1825년 볼리비아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의 이상은 미국처럼 라틴 아메리카를 아우르는 ‘라틴아메리카 합중국’을 건설하고 인종차별 없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당시 독립한 세계 최초의 흑인공화국 아이티도 그의 모델이었다. 체게바라에게 쿠바가 그런 의미였듯이 말이다.

그래서 독립전쟁이 일단락되면서 1826년 에스파냐계 공동체를 목표로 한 파나마회의를 개최하였으나, 각국 간의 대립과 이해관계가 얽혀 1830년 해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가 의도한 대콜롬비아공화국이 해체되자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얼마 안 가서 실의와 곤궁 속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1826년 그가 소집한 파나마회의는 ‘범아메리카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당시 그의 나이는 43세에 불과했다. 20년의 독립운동기간이 있었음에도 그는 젊었다. 그러나 그의 거대한 구상에 관심 없는 대토지소유귀족들은 ‘합중국’을 원하지 않았다. 실망한 볼리바르는 남미 여행을 떠나고 여행중에 사망하고 만다.

 

새로운 시작 볼리바르동맹

이런 볼리바르를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체게바라다. 체게바라에 대해 남미 사람들이 가지는 깊은 애정은 민중적인 문화에서 유래된 측면도 있지만 역사속의 볼리바르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졌음에도 자신의 이상이 왜곡되는 것에 대해 실망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을 버리는 용기, 그것은 존경할만 충분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 중남미 좌파 국가 모임인 ‘미주(美洲)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ALBA)’의 9개 회원국은 얼마전 회의를 열어, 내년부터 역내 무역 결제에 공동 가상 결제통화인 ‘수크레(SUCRE)’를 달러화 대신 사용하기로 했다. 때문에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지위가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볼리바르는 생전에 주위의 사람들에게 미국을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다. 미국이 중남미의 나라들에게 매우 큰 위협이 될 것이라는 볼리바르의 날카로운 예측은 결국 사실이 되었다. 쿠바 침공, 파나마 침공,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 등 미국은 중남미를 자신의 뒷마당이나 되는 양 마음대로 주물러 왔다.

볼리바르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꿈이 살아나고 있다. 남미는 미국의 앞마당이라며 세계지배질서의 터전으로 인식하던 미국의 반응이 궁금하다. 볼리바르에 대한 역사적인 그리움과 함께, 미국을 조심하라는 볼리바르의 경고를 같이 기억해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볼리바르의 낭만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창수(편집위원)

 
이 글은 2008년 시민사회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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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 신앙으로 무장하고 낮은세율로 제국을 건설하다 

 

이슬람의 사회개혁

혼란의 시대에는 종교가 등장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종교는 처음에는 사회혁명적인 주장으로 소외받는 대중들에게 파고 들고, 공동체를 만든다. 비록 주술에 의존한다 할지라도 그 너머에는 비록 비현실적이라 하더라도 기독교의 천년왕국설처럼,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는 내용이 포함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체제가 만들어지고 권력이 생기면 초기의 사회혁명적인 요소를 부정하고 체제유지의 도구가 되고 만다. 종말론을 주장했던 많은 종교가 그렇게 현실의 권력이 되었다.

 

가장 빠른 시간동안 제국을 형성한 이슬람은 이러한 종교의 정치학을 가장 강력하게 구현한 종교일 것이다. 마호멧은 처음에 신자들사이의 보편을 주장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었다. 부자들도 자선을 베푸는 조건으로 포용했다. 여성에게도 적지않은 호소력이 있었다. 여성보다 우월한(혹은 하다면) 남성이 여성을 보호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설교했으며 재산권도 허용했다.

 

종교를 창업한 사람이 직접 제국을 건설한 사례는 흔치않다. 특히 그 사후에 역동적 힘을 발휘한 경우는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마호멧은 그런 대표적인 선지자 이자 지도자이다. 순수하게 종교적인 측면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화나 종교관행과 커다란 차이는 없다. 가장 큰 차이는 그의 설교는 사회개혁을 위한 정치강령이었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무력 충돌이 일어나는 당시 ‘야만사회’를 질서 있는 ‘움마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이슬람에 있어서 확장전쟁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신앙과 낮은 세율로 제국을 건설

 630년 메카를 점령한 후 2년후 사망한다. 하지만 그의 강력한 메시지를 이어받은 후계자들은 정복전쟁을 계속한다. 그리고 642년에는 이집트까지 정복함으로서 20년 만에 이집트에서 시리아, 페르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이들의 성공은 사막의 ‘말’인 낙타를 이용한 전투력에 있기도 했다. 하지만 보다 결정적인 것은 비잔틴이나, 페르시아 등 낡은 제국들에게서 마음이 떠나 있던 사람들을 사로 잡았기 때문이었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새로운 국가구조를 만들지도 않았고, 개종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신앙을 존중했다. 단지 세금을 정기적으로 납부하라고 요구했고, 저항한 귀족들의 토지와 국가소유의 토지를 압류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유대인 페르시아인, 기독교인, 조로아스터인 등 주민대다수는 훨씬 나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는 유대인 작가는 ‘조물주는 인간을 악에서 구하시려고 이스마엘(아랍)왕국을 주셨다’고 찬양할 정도였다.

 

당시 아랍인들은 종교세로 소득의 2.5%를 내는 것 외에는 세금이 없었다. 다만 국유지를 빌려주는 경우에는 10%의 세금을 받았다. 비이슬람인들에게는 이전에 비쟌틴에 내던 세금을 그대로 받았으나, 공정하고 정확했기 때문에 불만은 적었다. 더구나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고 개종도 자유로왔다.

 

이렇게 신앙으로 무장하고 낮은세율로 침략하는 이슬람세력을 사치와 착취에 기반한 거대 제국들이 이겨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백년이 채 되지않아 이들은 서로는 프랑스부터 동으로는 인더스강까지, 북으로는 탈라스에서 당나라와 충돌하게 된다.

 

강압도 없는데 개종하면 세금을 적게 낸다는 것은 이슬람의 확산에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개종을 하게 되었고 비아랍계 무슬림(이슬람교도)이 제국의 대부분의 도시에서 다수가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들 개종자들을 ‘마왈리’라고 부른다.

 

초기의 정신을 잃고 제국도 잃는다.

 초기에 아랍인들은 종교를 설파하는 성전이라는 명분으로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정복이 정체되고 새로운 개종자들이 평등을 요구하자 돌변했다. 마왈리들을 차별하고 특권을 배제한 것이다. 결국 그들의 평등한 공동체는 아랍인의 공동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장점이었던 공동체의 신앙이 생명력을 잃게 되면서 제국은 정체되고 급속한 혼란이 오게 된다. 초기의 종교적 신심은 제국이 건설되고 권력이 생기자 방어하는 종교적 논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종교를 확장시키려고 성전을 벌여놓고는 개종하지말라고 협박하는 상황인 것이다.

 

초기 시아파와 수니파의 시작은 이러한 갈등구조에서 시작되었다 정통 마호멧의 후계자인 알리를 추종하는 시아파는 오히려 아랍부족이 아닌 폐르시아 등 타 부족 출신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슬람화된 사회에서 초기 공동체의 이상을 가지고 천년왕국의 검은 깃발을 내세운 것이다. 실제로 이들을 기반으로 아바스 왕조가 건설되기도 했다.

 

아무튼 아랍인들은 초기의 열정이 식고, 무슬림이 무조건 많아지는 것이 자신들에게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자 개종을 권하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말리고 억압하기까지 했다. 세입감소를 우려하여 농촌으로 쫒아버리기까지 했다. 아랍여인과의 결혼은 꿈도 꿀수 없었다.

 

이들이 평등한 공동체라는 종교적인 원칙까지 무시하면서 마왈리들을 탄압했던 것은 당시 이슬람을 지배한 우마이야 왕조가 소수의 아랍인이 세금을 내는 다수의 비무슬림을 지배한다는 전제위에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왈리에게 동등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곧 세입의 감소와 세출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가구조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록 마왈리와 아랍인의 구분이 인종적인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아랍인을 의미하는 디완(인명부, 연금대상자)에 등록되지않는 아랍하류층도 사실상 마왈리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러한 노력을 하더라도 이들 개종자들인 마왈리들은 이미 군대의 다수를 이루고 있었고, 정치적으로 ‘알리의 당,’운동 등 세로운 세력을 형성하면서 마침내 아랍인이 지배하는 이슬람제국은 무너지고 분열하게 된다.

 

따라서 이슬람의 팽창은 당분간 멈추게 되고 각 민족들은 특유의 이슬람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이것이 이슬람이 아랍을 벗어나는 세계종교가 된 이유이고, 동시에 아랍인들이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들어내지 못한 세계제국의 이유가 된다. 제국을 원하거든 제국을 이룬 이유를 알아야 하고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

 

 

 

참고도서

김정위, <중동사>, 대한교과서. 1987

버나드 루이스, 김호동 역, <이슬람 1400년>, 까치. 1994

정수일. <이슬람문명>, 창작과비평사. 2002

진원숙. <충돌의 역사>, 신서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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